용산참사 10년, 도시개발과 부동산 욕망

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 기사입력 2018/11/21 [14:28]

용산참사 10년, 도시개발과 부동산 욕망

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 입력 : 2018/11/21 [14:28]

[편집자 말] 2개월여 후 2019년 1월 20일은 용산참사 10주기이다. 10주기를 앞두고 <용산참사 10년, 도시개발과 부동산 욕망>이라는 주제로 3차례의 원고를 싣는다. 1회에서는 용산참사와 도시개발 폭력의 역사를, 2회에서는 현 시기 개발과 도시재생에 대한 진단을, 3회에서는 부동산 독점의 시대와 용산의 비극을 다룰 예정이다.

 

▲ 지난해 8월 23일 서울 송파구 거여동 송파상운 차고지 부지에서 포크레인을 앞세운 용역들의 강제집행을 막던 한 버스기사가 무언가에 맞아 쓰러져 있다.  <사진=뉴시스>

 

지금, 여기의 용산참사

2016년 봄, 노원구 인덕마을 재건축 지역에서 철거 용역깡패들의 폭력에 주민 23명이 늑골이 부러지는 등 전치 2~6주의 부상을 당했다. 유혈이 낭자하던 당시의 장면은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혼돈스럽게 했다. 같은 해, 마포구 신수동 재건축지역 철거민은 용역들이 쏜 소화기 분말을 뒤집어 쓴 채 끌려 나왔다. 그는 3년째 구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지만 그 마저도 수차례 철거당했다. 2017년 연말과 올 초 겨울, 장위 뉴타운지역과 응암 재개발지역에서는 서울시의 동절기 철거금지 원칙이 무색하게도 수차례의 폭력적인 겨울 철거가 진행됐다. 작년 5월 개포 8단지 재건축 지역에서도 400여 명의 용역들이 상가 세입자 10명이 모여 있던 좁은 공간에 소화기 8대를 난사하면서 끌어냈다. 지난 9월에는 태어나 70년을 살아온 집을 빼앗기게 된 아현동 철거민이 건물 3층 아시바 철근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강제집행에 저항했다. 개발지역은 아니지만 상가임대차 분쟁을 겪고 있는 서촌 궁중족발에서는 새벽 4시에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지게차로 문을 들이받아 건물 앞면을 부수고서 강제집행을 강행했다.

 

용산참사 10년, ‘더 이상 폭력적인 철거는 없다’는 선언들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철거는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며 과거의 사건인 양 고립되고 가려지고 있다. 도시개발의 패러다임이 도시재생으로 전환하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제2의 용산참사’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건 지역들이 도처에 있다. 개발과 강제집행이 있는 곳은 여전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도시개발 그 폭력과 저항의 역사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 1978년 출판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철거촌 동네의 이름이다. 20일 안에 자진철거하고 떠나라는 철거 계고장이 붙은 동네. 계고 기간이 지났다고 식사 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철거반들이 쇠망치를 들고 멋대로 담을 부수던 동네. 낙원도 아니고 행복도 없을 것 같은 가난한 철거촌의 이름이 낙원구 행복동이다. 이 이름은 낙원같이 화려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삶터에서 쫓겨나야 하는 가난한 이들의 지옥 같은 현실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누군가의 낙원을 위해 파괴하려고 하는 이 동네가,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작은 행복이 있는 동네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작은 존재인 아버지는 이 죽은 땅을 떠나 쇠공을 타고 달나라로 가려 했고, 아들 영호는 그 집을 떠날 수 없다고 버티려 했던지도 모르겠다.

 

“철거반만 오면 아이들은 놀다가도 ‘엄마, 철거반 아저씨들이 곡괭이, 몽둥이 들고 와. 빨리 나와!’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허겁지겁 맨발로 뛰어나와 살림을 챙기고 판자조각이라도 부서질까봐 주섬주섬 뜯을 때는 정말 숨이 꽉 막히고 심장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1975, 충랑천변 이문동 철거민 호소문 ‘어머니의 호소’)1) 압축적 경제성장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개발은 경제성장, 발전의 상징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난을 극복하는 프로젝트로 제시되면서, 개발을 통한 화려한 도시로의 변화는 우리의 삶의 풍요를 보여주는 발전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선전됐다. 개발로 쫓겨나는 이들의 문제는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수적인 것이나 국가 전체를 위해 양보해야 할 개인적인 피해쯤으로 치부했다. 도시의 발전과 주택공급,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 등의 온갖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지난 도시개발의 역사는 한마디로 ‘폭력의 역사’였다. 1975년 중랑천변이 철거되면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던 주민대표가 낭독한 ‘어머니의 호소’나 ‘낙원구 행복동’으로부터 40년의 시간과 공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철거민들의 시간과 공간은 박제돼 있다.

 

도시개발 폭력의 역사는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늘어난 판자촌 등 무허가정착지에 대한 단속에서부터 시작됐다. 어느 사회에서나 도시빈민들이 거주하는 무허가정착지는 도시의 환경 미화나 토지의 효율적 활용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또는 사회의 불만 세력이나 소외 집단의 대규모 거주지라는 점에서 각종 규제와 단속 대상으로 간주됐다.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도시로 밀리듯 유입된 사람들 중 기존의 공식 주택시장에 진입할 경제적 기반이 없는 이들이 하천변이나 산등성이의 빈 땅을 무단 점유하고 천막과 판잣집 등을 짓고 생활하면서 무허가 정착지에서 도시난민의 삶을 살았다. 1950~60년대의 개발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속이라는 이름의 철거와 철거민들의 복구가 반복됐고, 철거민들의 저항도 경찰, 구청직원과의 충돌이나 임시방편적 수준의 요구에 머물렀다. 그러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 경제성장으로 효용가치가 높아진 청계천 일대 등 서울 도심지의 무허가 판자촌을 대대적으로 철거하고 외곽의 집단 이주정착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이 추진되며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1971년 수만 명의 군중이 관공서 등 주요 거점을 장악하며 저항해 당시 폭동이라 불리던 광주대단지 사건은, 엄혹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시기에도 도시개발의 극심한 폭력으로 밀려난 철거민들의 분노를 보여줬다.

 

1980년대 개발의 폭력은 집단 이주정착지로 조성된 달동네 지역을 아파트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불량주거지 정비라는 정부의 정책적 필요와 중동 건설에서 돌아온 유휴 건설 장비와 자본을 투자할 활로를 찾던 건설자본의 요구가 맞물리면서, 민간 주도의 새로운 개발방식이 전개됐다. 1983년 도입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합동재개발 방식이 그것이다. 합동재개발은 토지와 주택 소유주들이 조합을 결성해 건설사와 함께 개발하는 민간 주도 방식으로, 이윤추구 동기가 분명해진 개발방식은 더욱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1986년 폭력조직이 설립한 입산개발 등 철거업무를 대행하는 철거용역 업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70년대 판자집을 단속하던 구청 ‘철거반’이 아닌 본격적인 ‘철거 용역 깡패’ 회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자행된 철거의 폭력성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86년 한 해 철거 현장에서 5명이 숨졌고, 86년에서 88년 2월 사이에 14명이 강제 철거 때문에 사망했다고 한다. “86, 88이 사람 죽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 시기 철거폭력을 두고 1987년 국제주거연맹(HIC)은 한국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게 철거하는 나라’로 지목했다.

 

철거 폭력이 극심해질수록, 철거민들의 저항도 더욱 조직화 됐다. 1983년 목동철거민 투쟁을 원동력으로 사당동, 상계동, 양평동 등지의 세입자들이 격렬히 투쟁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강화된 철거민운동은 1987년 7월 17일에 각 개발지역의 공동투쟁 조직인 ‘서울시 철거민협의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철거민들의 투쟁은 부동산 폭등 문제와 맞물려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됐고, 1987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철거민들의 투쟁이 결합하면서 확대됐다. 이러한 대규모 개발에 맞선 저항의 80년대 철거민 투쟁과정에서 건물잔해에 깔리거나, 비관자살, 용역깡패의 폭행, 방화 등으로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친 후에야, 1990년을 전후로 영구임대주택 정책 도입 등 세입자용 임대주택 정책이 도입됐다.

 

1990년대는 여러 철거민 투쟁이 승리한 의미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철거 폭력 또한 더욱 악랄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90년대는 개발기간 동안의 임시주거시설인 가이주단지 쟁취와 미 해당자로 분류된 철거 세입자들의 공공임대주택 쟁취가 주요 쟁점이었다. 다큐 ‘행당동사람들’로 유명한 금호, 행당, 하왕십리동의 송학마을 철거 세입자 102세대의 1995년 가이주단지 쟁취를 시작으로 삼양동, 미아동, 무학마을(하왕1-3), 바탕마을(금호6) 등에서 연이어 가이주단지를 쟁취했고 임대주택으로 집단 재정착했다. 그러나 철거 폭력은 더욱 악랄했다. 입산개발에서 나온 이들이 설립한 철거용역깡패 업체인 적준개발(이후 다원건설)이 서울시 재개발 현장을 독점하다시피하면서, 각목에 못을 꽂고 들이닥치는 등 칼부림과 집단폭행, 성폭력 등의 악랄한 폭력을 자행했다. 당시 인권〮사회단체들이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사법처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대응까지 할 정도였다. 폭력에 맞선 이 시기 철거민들도 망루투쟁을 비롯해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더욱 위험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며 도시공간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전 지구적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한 도시전략이 추진됐다.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분도 사라진 채, 지구적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를 위한 개발이었다. 신자유주의 도시화를 구성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Project Financing) 등 부동산 금융화가 본격화 되면서, 기존의 건설재벌에 금융세력과 지방의 군소 토호세력까지 합세한 강력한 개발동맹체제가 구축됐다. 2002년부터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추진한 뉴타운 광역개발 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 도시의 이러한 욕망들을 집결시켰다. ‘타운돌이’2)라 지칭되던 정치적 욕망과 집값 상승이라는 개인의 욕망들이 결합되면서 개발의 욕망과 환상은 거품처럼 팽창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정점에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이 참혹한 용산참사를 필연처럼 맞닥트려야 했다. 이 시기 뉴타운 환상에 쫓겨나는 철거민들의 저항은 상가 세입자들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미 상권이 발달한 서울 도심에 대규모 뉴타운 광역개발과 상업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상가세입자들의 생존의 문제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결국 상가세입자였던 용산 철거민들이 살기위해 망루에 올랐고, 죽어서 내려왔다.

 

우리의 용산과 저들의 용산

용산참사가 발생한 용산4구역의 용산 한강로 일대는, 당시 서울역에서부터 한강에 이르는 구간까지 서울의 ‘신(新) 부도심’ 개발을 위한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삼성물산이 대표 컨소시엄을 맡고 26개의 금융, 건설재벌들이 총출동해 재무, 전략, 건설부문 투자자로 나서며 사업비 50조에 달하는 대규모 개발프로젝트를 세우고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그 광란의 폭주 중심에 ‘단군 이래 최대의 개발’사업이라 칭하던 용산국제업무 지구 개발사업이 있었고, 결국 이는 2013년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라는 부도 사태로 귀결됐다. 여섯 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를 ‘참사’로 표현하기 보다는 ‘사건’으로 표현하려 했던 조선일보는, 메가 개발 프로젝트인 용산 역세권 개발사업이 최종 부도처리 되자 그 사건을 ‘용산참사’라고 표현했었다. 자본과 그를 비호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용산개발의 부도사태가 국민 몇 명이 죽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참사였을 것이다.

 

삼성물산이 대표 컨소시엄 시공을 담당한 용산4구역 개발은 어느 지역보다 빠르고 폭력적으로 추진됐다. 83%를 차지하던 지역 세입자들은 대책 없이 쫓겨나게 됐고, 생계마저 빼앗기게 된 상가세입자들이 망루에 올랐다. 용산참사 발생 1년도 훨씬 지난 2010년 10월, 법원은 용산4구역 개발사업에 절차상 중대한 위반이 있었다며 관리처분인가 무효를 판결했다. 여섯 명이 주검이 돼 땅속에 묻히고, 모든 것이 철거된 후에야 말이다. 그렇게 잘못된 개발의 참상을 두고두고 똑똑히 보라는 듯, 7년이 넘게 용산4구역 개발은 멈춰져 고작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7년 동안 방치됐던 용산참사 현장은 시공사가 바뀌어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라는 낯설고 모호하기까지 한 이름이 붙여져 ‘신(新) 용산시대’를 알리며 참사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고층의 주상복합을 쌓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용산이, 저들만의 용산으로 덧칠되게 할 수만은 없다. 지금도 반복되는 제2 용산의 절규들만 보더라도, 우리는 용산참사를 2009년 1월 20일에 있었던 과거의 한 사건으로 가둬둘 수 없다. 검붉게 타오르는 화염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박제해 둘 수 없다. 물리적 공간인 참사의 흔적이 지워진다고, 각인된 우리의 분노와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 같은 개발 폭력과 저항을 지울 수 없다. 다가오는 1월이면 용산참사 10주기다. 우리가 여전히 결코 잊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워커스 48호]

 

1. 한국도시연구소, 1998, 철거민이 본 철거

2. 2008년 18대 총선에서, 무분별한 뉴타운 공약으로 대거 당선된 의원들을 '타운돌이'라 불렀다.

 

*이 글은 <참세상>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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