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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는 나라의 생존법
기사입력: 2017/08/16 [09:33]  최종편집: 시사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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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택 논설주간

 

 

 

류재택 논설주간(대통령연구소장, 정치학박사)

 

 

러일전쟁이 끝나가던 1905729,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일본을 방문하였다. 러시아와의 강화 주선을 미국에 요청했던 일본은 가쓰다 다로 수상이 직접 태프트를 영접하며 밀담을 나누었다.

 

가쓰라는 조선 고종이 러시아대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친러내각을 만들고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 것을 지목하면서 조선을 그냥두면 또 러일전쟁같은 참화를 일으키게 되니 일본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태프트는 일본이 조선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침략의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가쓰라-태프트밀약이다. 밀약은 양자의 대화를 기록한 각서(memorandum)일 뿐 국가 간의 협정이 아니지만, 미국과 일본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이 밀약은 19년간 비밀에 부쳐졌기에 알지 못했던 고종황제는 태프트 일행이 일본 방문 후 필리핀, 중국을 돌아 조선에 들어오자 국빈으로 대접했고, 특히 함께 온 루스벨트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를 공주로 대하며 매달렸다.

 

고종은 최초로 궁궐에서 만찬을 개최하는 등 앨리스를 예우했지만, 앨리스는 승마복을 입고 나타나 장난을 치는 등 조선을 얕보고 황실을 무시했다. 심지어 일본의 국모시해 만행을 알리려고 명성황후의 릉(홍릉)을 방문했을 때 앨리스는 릉 앞에 세워진 말 모양의 석물 위에 승마장화를 신은 채 올라앉아서 승마채찍을 들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태프트는 아시아순방 직후에 초대 필리핀 총독이 되었다가 루스벨트대통령의 후계자로 제27대 미국대통령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은 그런 태프트와 국제정세를 비중 있게 논의하지도 못했고, 조선을 위한 어떤 약속도 받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로 인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가 비밀리에 파견한 밀사들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으며, 밀사들이 찾아간 미국대표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라며 외면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밀사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강제합병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선은 국제정세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자국을 지켜낼 어떤 힘도 없었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배제된 이후 가-태 밀약으로 미국마저 외면하였으니 일본이 조선을 삼키는데 아무런 장애가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을사늑약 당시와 비교해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북한이 5차례의 핵실험과 ICBM발사 성공으로 국가존망의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도 높은 시점이다. 더욱이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발언에 이어 김정은의 괌 포위사격발언 등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고, 역할을 수행할 힘도 없다. UN제재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으며, 중국을 설득하여 북한을 압박하는 일도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 UN제재에 역할이 없고, 오히려 중국의 눈치를 보며 제재에 장애가 되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북한의 잦은 도발에도 한국이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미 항공모함의 한반도해역 이동, 괌 주둔 전략폭격기 B1B랜서 전개 등을 요청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을 잘 아는 북한이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의 헛소리라고 비웃는데도 우리 정부는 말이 없다.

 

한국은 북핵문제를 해결할 힘도 없지만, 특히 심각한 것은 북핵을 미·북간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북핵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배제시키려는 북한판 가쓰라-태프트 밀약인데, 우리 정부는 북한이 마치 미국과 대결하기 위해 핵미사일을 개발한 것처럼 인식하고, 우리가 미국을 위해 북핵을 해결하고 대화하려는 듯한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ICBM발사에 미국과 일본의 정상은 즉시 통화하고 긴밀히 협력하는데도 당사국인 한국은 한참 늦게 마지못한 듯 뒤따라가고 있다.

 

더욱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갈팡질팡이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외치며 대화를 주장하더니 갑자기 압박과 제재로 돌아섰다. 사드배치도 환경영향평가로 발목 잡더니 북한이 미사일을 쏘자 즉시배치로 돌아섰다. 그러나 여전히 즉각임시배치라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자파측정도 하는 둥 마는 둥, 부속장비와 연료조차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사드는 청와대를 지키는 무기가 아니다. 주한미군을 지키는 미군의 방어무기다. 미군이, 미군을 지키는 무기를, 미군의 돈으로, 미군에 배치하는데도 한국정부가 자꾸 지연시키고 있다. 이런 나라를 지켜주려고 미국은 언제까지 자국군대를 위험에 방치할까. 트럼프대통령이 아베와 협조하고 시진핑과 줄다리기할 때 당사국인 한국 대통령에게는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있을까.

 

국제정치는 냉엄한 현실이고, 무엇보다 힘의 원리가 우선하는 현장이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를 남이 지켜주기는 어렵다. 우리가 힘이 없을 때 오히려 이웃은 우리를 침략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만이 아니다. 불과 60년 전 북한의 침략을 받았고, 100여년 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중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아놓고도 모르는가.

 

우리가 힘이 없을 때 유일하게 군대를 보내서 지켜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6.25때 군대를 보내서 한국을 지켜주었고, 휴전 이후에도 계속 군대를 주둔시켜 지켜주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군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은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채택된 이래 외교의 기본책략으로 꼽힌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면 힘센 친구라도 사귀어야 한다. 힘센 나라가 가까우면 침략할 우려가 있으니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 이웃한 일본, 중국이 통일되거나 강해질 때마다 우리를 침략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를 도와주고 구해준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는 또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의 운명을 지킬 힘도 없이 주변국의 손에 맡겨져서 제2의 을사늑약을 초래할 것인가, 아니면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자유대한민국을 유지할 것인가. 결과는 하늘에 달렸지만 선택은 우리 몫이다.

 

백성들이 또 나라를 잃고 피눈물 흘리며 광복을 위해 싸우도록 만들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100년 전의 조선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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